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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과문 현대건축의역설(2004.2) 김성홍
제목: 창과문 현대건축의역설(2004.2)
이름: 김성홍


등록일: 2005-03-26 12:12

<대한건축학회 [건축] 2004년 2월호 특집>
  
都市風景: SHOW+WINDOW
(Urban Landscape: SHOW+WINDOW)

특집을 기획하며
특집주간: 김성홍(서울시립대 건축도시조경학부)

현대건축의 현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모더니즘이후에도 남아있었던 고전미학체계의 퇴조, 기술과 생산방식의 변화와 이론화, 새로운 건축유형의 등장, 디지털혁명, 공간환경정책에 따른 도시공간의 재배치 등이다. 회화적, 시지각적, 인식론적 범주에서 반전을 반복하던 20세기와 달리 21세기의 건축은 기존의 지식과 방법론으로 대처할 수 없는 학제간 교류(interdisciplinary)의 구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공을 갖되, 영역을 넘어 타분야와 소통하거나 심지어 넘나들 수 있는 시각과 유연성이 필요하다. 건축에서도 지난 10여 년간 학부제와 5년제 전환을 통해 학제간교육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건축학 5년제를 시행했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4년제 교육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도의 운영상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주체들의 관점과 태도, 그리고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현실과 달리 학계의 벽은 여전히 높다. 전공영역이 세분화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이 同種인 것이 문제다. 건축계에는 수많은 학회가 있지만, 그 회원은 중복된다. 그리고 회원은 대부분 학부에서 건축과를 졸업한 건축인들이다. 대학의 출신과에 따라서 영역이 결정되는 ‘전공 순혈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학벌주의다.

이번 특집의도는 학제와 학계의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이되, 다영역에 속한 학자들이 동일한 관심사를 갖고 논의의 장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번 특집의 필진을 서울시립대 교수진으로 한정한 것은 앞에서 제기한 학연의 문제와 일견 모순되나, 실상은 필진의 전공과 관점을 다양하기 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다. 집필자들과 여러 차례의 토론을 통해서 대주제와 소주제를 정하고 글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거리에서 쉽게 대면할 수 있는 느슨한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주제를 정하기에 앞서 집필진이 모여서 토론을 했는데 거창하고 모호한 주제보다는 쉽게 이야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을 통해 논의의 심도를 더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평소 도시공간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필진이 쇼윈도(Show+Window)를 주제로 정했다. 쇼윈도는 현대도시의 얼굴이다. 그러나 쇼윈도는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 스크린, 달리는 차창에도 있다. 시선이 닿는, 시선을 여과하는 모든 장치는 쇼윈도다. 대주제를 하나로 정하고 두 차례의 토론을 통해 소주제를 발전시켰지만, 각자의 글은 그 하나로서 독립적이다. 글쓰기의 방식과 결도 모두 다르다. 쇼윈도를 통해 도시풍경과 그 뒤에 숨겨진 삶과 문화를 읽고자 했다. (김성홍)

窓과 門: 현대건축의 역설
Window and Door: Paradox of Contemporary Architecture

서울시립대 건축도시조경학부
김성홍

서양건축사를 창을 뚫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건축을 격하하는 것이 될까? 높고 깊은 공간과 큰 개구부의 기술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시민의 잠재적 갈등과 불만은 콜롯세움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스펙타클로 카타르시스된다. 한반도의 삼국시대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4만5천명이 들어가는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지금은 스펙타클을 볼 수 없다. 맹수와 투사가 싸우던 전장바닥은 허물어져 지하통로가 드러나고, 로마시민이 앉아 열광하던 자리는 대부분 없어졌다. 그러나 거대한 아치와 피어 앞에서 거대한 창과 내부공간을 만들기 위한 고대인의 노력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피어의 폭은 사람이 누워 다리를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넓다. 그 위에 올려진 아치 역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과연 ‘시각적 거대성’을 의도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피라미드를 보라.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압도적 매스속의 내부공간은 지극히 미미하다. 이 정도의 내부통로와 무덤을 만들기 위해 2톤 이상의 돌을, 230만개나 쌓았다는 것은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일의 역사학자 리글은 고대 이집트인은 거대한 공간에 대한 공포(horror vacui)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보다는 외부지향적인 3차원의 거대한 입방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에 가깝다. 리글의 이론은 역사학계에서 원하는 고증학적 자료와 객관적 논리가 약해서 논란이 되긴 하지만, 고대인이 거대한 내부공간을 지향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콜롯세움과 동시대에 지어졌던 판테온을 최초의 공간인식이라고 보는 것은 이점 때문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벽에 뚫린 ‘窓’은 시각적 방해요소다. 실제 어두운 실내공간에서 좁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은 극적일지는 몰라도 시각적으로 혼란스럽다. 기념비적 건축에 창을 도입하는 것은, 밝게 채워진 곳과 그림자가 진 부분을 리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자, 고대인이 의식치 않았던 遠景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창의 도입은 내부공간이 중심성에서 장방향성으로 전환하면서 진행됐다. 판테온에서 바실리카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건축사에서 ‘창의 등장’과 ‘깊고 분화된 내부공간’은 닭과 달걀의 관계였다. 고딕성당의 가늘어진 피어와 천장의 볼트는 기둥으로 방해받지 않는 회중석과 이를 밝히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창은 기술적으로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서양건축사를 보면 고딕성당의 지붕이 주저앉거나 변형되는 것이 다반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디온이 18세기까지 서양건축의 핵심문제를 볼팅의 변화 과정으로 보았던 이유나, 프랑클이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성당의 돔을 완성한 1420년부터 19세기말까지를 하나의 시대로 보았던 것은 개구부와 지붕의 문제가 기술?양식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지 반증한다.

철근콘크리트의 발명으로 건축은 이 문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철골구조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적어도 기술적으로 벽에 큰 구멍을 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에는 2미터 크기 정도의 유리생산이 가능해졌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우하우스 학교의 투명창은 벽에서 해방된 서양건축을 과시한다. 콜린로우는 바우하우스의 직설적 투명성을 꼬르뷔제의 현상적 투명성보다 한 수 아래의 것으로 비평한다. 직설적 투명성은 유리와 같은 재료 때문에 드러나는 시각적 현상이지만, 현상적 투명성은 입체파 그림이 표현하는 것과 같은 추상화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창의 자유로움과 투명성을 건축화한 사람은 꼬르뷔제다. 아돌프 로스의 창과 꼬르뷔제의 창을 비교한 꼴로미나의 페미니즘 비평은 로우의 비평과 대조적이다. 로스가 설계한 집의 창가에는 소파가 놓여있다. 이방에 들어온 남자 손님은 창을 등지고 앉아 거실을 바라본다. 등 뒤로 들어오는 빛은 거실은 안온하게 비춘다. 집의 중심을 차지하는 여자의 방은 거실보다 높다. 창가에 앉은 남자손님의 실루엣을 지배하는 사람은 이방의 여주인이다. 로스의 창은 아래위로 길다. 꼬르뷔제의 집의 창은 옆으로 길다. 수평창이다. 수평창가에는 아무것도 없다. 건축산책로를 따라 올라온 남자손님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원경을 조망한다.

도시풍경을 조망하는 창이 결코 근대발명품은 아니다. 베로나의 빠라쪼 창밖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 연인을 내려다보는 쥴리엣을 생각해보라.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대한 바로크정원을 내려다보는 궁전의 창을 보라. 그러나 실내공간을 밝히는 소극적 창에서, 관조적 조망자를 위한 적극적 창이 일상건축에 통용된 것은 근대적 사건이다. 기디온의 옹호했던 상호관입하는 매스의 조합과 무한히 열린 공간에는 항상 조망자가 서있다. 빛나는 도시의 아파트 꼭대기에 꼬르뷔제는 큰 눈을 그려 넣었다. 窓은 바깥세계와의 시각적 疏通口다. 그러나 벽에 구멍을 내고 맑은 유리창을 끼워 넣은 것이 기술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순간부터 창은 오히려 바깥세계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경계가 된다.

창의 개방성과 프라이버시와의 관계를 다룬 영국학자 쥴리엔 한슨의 재미있는 논문이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런던의 노동자주택은 한때 슬럼화되었다가 작가, 방송인, 배우, 변호사 등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주거건축으로 변모되었다. 노동자들이 살았던 당시 길에 면한 문은 항상 열려있었고 주부들은 문턱에 서서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길이었다. 그러나 팔러라고 불리는 길쪽의 방은 항상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팔러는 가족이 평소에 쓰지 않는 의례적, 상징적 방이다. 새로운 중산층이 들어오면서 팔러는 거실로 바뀌었다. 커튼은 사라지고 라이프스타일을 과시하듯 내부는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관문은 닫힌다. 이제 약속을 하지 않고 옆집에 가는 것은 금기다. 문은 닫히고 창은 투명해고 문은 닫힌 역설이다. 투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경계를 넘는 암묵적 코드가 있다는 것이다. 창의 투명함은 역설적으로 근대적 프라이버시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대를 이집트, 그리스, 로마, 유럽대륙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보는 유럽대륙 중심의 사관이다. 극동 극동아시아의 건축, 그 중에서도 한국건축을 이렇게 볼 수 있을까? 고대 지중해의 국가들이 벽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후 지붕을 덮는 방식에서 피어와 아치, 볼트, 그리고 기둥과 보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면, 극동아시아에서는 같은 구조방식을 수 천년이상 고수했다. 특히 한국고건축은 목구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결구법과 공포의 기법으로 목구조를 여러 갈래로 구별하지만 크게 보면 그것은 고대중국에서 정립한 영조법의 변형과 변용일 뿐이다. 구조와 재료의 측면에서 놀라운 지속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기둥과 보, 지붕을 결구하고 벽을 붙이는 한국 고건축의 건설공정은 고대서양건축의 정반대다. 창호는 공정의 가장 마지막 단계다. 젬퍼는 전자를 스테레오토믹, 후자는 텍토닉이라고 구분했다. 텍토닉 공법에서 큰 창을 만드는 것은 구조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둥사이는 모두 창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벽에 큰 구멍을 어떻게 낼 것인가가 아니라, 큰 구멍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한 겨울 경복궁 근정전에 들어가 보라. 사방으로 난 창으로 새들어오는 찬 바람에 용상의 임금님도 한기를 느꼈을 것이다. 반면 창문을 모두 열거나 들어 올린 여름의 근정전은 훌륭한 의례공간이다. 목구조는 여름의 건축이다. 창이 없는 병산서원의 만대루나 여수 진남루를 보라. 벽을 막는 창과 문은 구조?재료상 큰 차이가 없다. 문을 열면 창이고, 창이 크면 문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창문’이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닐까? ‘창’이 개방과 차폐의 조절장치라면, 문은 사회적 위계구조를 분화하는 물리적 장치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조망만을 위한 창은 흔치 않다. 창은 시각적 틀이자, 공간의 켜다. 한국건축의 창호지 한 장 차이는 서양건축 공간의 몇 겹에 해당한다. 콜린로우가 한국건축의 창살과 창호지를 보았다면 현상적 투명성을 다르게 해석했을 것이다.

창은 문에서 이제 결별했다. 여기에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 조망은 권력이며 돈이다. 창이 투명해지고, 커질수록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공간의 장벽은 높아진다. 미스가 바르셀로나 파빌리언을 통해 보여준 건축의 열림과 투명함은 환상일 뿐이다. 역사도시 서울에서 투명함과 열림의 역설은 더하다. 커튼월로 덮힌 사무소 꼭대기 층의 기업총수의 방이나,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타워팰리스의 거실을 보라. 거리의 일상을 초월할 수 있기에 창은 얼마든지 투명해질 수 있다. 위에서 열린 창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폐쇄적인 문으로 바뀐다. 오피스건물의 1층은 임대료가 가장 높은 은행이나 고가매장이 차지한다. 들어 갈수 있되 철저하게 통제한다. 타워팰리스 저층은 사방으로 개방된 훌륭한 오픈스페이스다. 그러나 진입을 막는 묵시적 코드가 있다.

투명한 창은 소비의 코드이기도 하다. 서울시내의 요즈음 식당을 보라. 앉아서 연기를 피우며 고기 굽는 모습이 드러나야 식당이다. 커피샵, 부띠끄, 헤어살롱... 봄과 보임의 스펙타클. 창은 모든 사람을 유혹하지만 문은 소비하는 자에게만 열린다. 서울의 거리풍경은 소비의 스펙타클이다. 스펙타클은 공공공간이 인색하다는 반증이다. 길은 자동차에 점령당하고 노점상과 가로시설물이 앞길을 막는다. 공공공간은 좁아지고 끊어지고 막힌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갖고 있는 땅도 팔아서 예산적자를 메우고, 시민은 생존권을 위해서는 당연하다는 듯 공공공간을 무단 점유한다. 공간의 확보는 전적으로 개인의 손에 달려있다. 모두가 건물 안으로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 아파트는 커야 한다. 바깥은 빈약하고 열악하기 때문에. 투명해서 바깥의 일상을 관조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가솔린 연기가 자욱한 길을 차창으로 내다보며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넓고 투명한 창의 이미지는 반복 재생산된다. 건축현상설계의 투시도는 투명창이 지배한다. 요즘 현상설계만을 주로 하는 컴퓨터그래픽 전문가들은 투명창이 없는 안은 당선가능성이 적다고 건축가들을 충고까지 한다고 한다. 모형에서 그래픽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내부를 보여주는 방법은 피부가 투명해지는 것이 최고다. 직설적 투명성의 대량생산이다. 투명한 유리는 거리의 스펙타클을 반사하는 효과도 거둔다. 대중은 공간보다는 이미지를 먼저 읽는다. 서울의 도심에서도, 산자락에서도, 바닷가에서도 건물은 투명해진다. 투명하지만 폐쇄적이다. 관조적 조망자와 소비의 스펙타클은 하나가 되어 도시의 창을 만든다. 모두가 승자처럼 보인다. 전자는 공공공간을 회피함으로써, 후자는 공공공간을 담보로 하면서 모두 승자처럼 보인다.

유럽의 건축은 벽에 창과 문을 내면서 진화했고, 한국건축은 창과 문으로 벽을 막으면서 진화했다. 근대건축은 이 차이를 제거해 버렸다. 콜린로우가 직설적 투명성을 한 수 아래로 평가하고, 현상적 투명성을 옹호한 것은 투명성이 이미지에서 공간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의 도시풍경은 이를 조롱한다. 창은 커지고 문은 작아진다. 창은 투명해지고 문은 닫힌다. (완)

<그림1: > 콜린로우는 바우하우스의 직설적 투명성을 꼬르뷔제의 현상적 투명성보다 한 수 아래의 것으로 비평한다. 직설적 투명성은 유리와 같은 재료 때문에 드러나는 시각적 현상이지만, 현상적 투명성은 입체파 그림이 표현하는 것과 같은 추상화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그림2: > 빛나는 도시의 아파트 꼭대기에 꼬르뷔제는 큰 눈을 그려 넣었다.
<그림3: > 거리의 일상을 초월할 수 있기에 창은 얼마든지 투명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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